I saw my seen



Hwangumhyang, Seoul, KR
2026. 08. 04 ~ 2026. 08.22


















































기획의 글


우리의 시선은 서로를 향해있다. 그럼에도 감각은 끝내 각자의 몸 안에서만 일어난다. 내가 본 것은 나만의 시각과 기억을 통과한 하나의 경험이며, 타자는 그 자리에 끝내 도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대상을 바라보고, 같은 이미지를 공유하며, 가끔은 같은 이해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믿음과 그 사이의 간극은 때로 보이지 않던 과정과 매개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평소에는 이같은 질문을 의식할 일이 거의 없다. 세계는 너무도 선명하게 우리 앞에 펼쳐지고, 시선은 그것을 직접 마주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술 역시 이러한 감각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왔다. 더 높은 해상도와 더 빠른 속도, 더 매끄러운 인터페이스는 세계와 우리 사이의 거리를, 그리고 우리와 우리 사이의 거리를 끊임없이 지우려 한다. 스크린의 베젤이 점점 얇아지는 양상처럼 매체는 스스로를 감추고, 사용자는 매개를 의식하지 않은 채 내용과 직접 마주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세수를 하기 위해 안경을 벗듯 어떤 순간에는 그 효과가 잠시 흔들린다. 렌즈에 남은 얼룩, 시야를 떠다니는 작은 점, 화면 위로 번지는 균열, 문장의 어색한 끊김. 평소에는 배경으로 물러나 있던 것들이 불현듯 전면으로 떠오른다. 그 순간 시선은 더 이상 세계만을 향하지 않는다. 세계를 보게 했던 조건과 의미를 가능하게 했던 구조가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날 비(飛)와 모기 문(蚊)으로 표기하는 안과질환 비문증(飛蚊症)은 그러한 경험을 일상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비문증은 유리체 안이 혼탁해지거나, 망막의 박리 등으로 인해 마치 눈앞에 무언가 떠다니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질환이다. 벌레나 점, 실과 같은 형태로 보이는 이 부유물은 유리체 안에서 발생한 흔적이다. 우리가 세계 위를 떠다니는 대상으로 경험하는 그것은, 실은 언제나 시각을 가능하게 해온 유리체라는 매개가 불현듯 모습을 드러낸 결과이다. 여기서 시선은 대상을 향하는 대신, 자신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을 함께 마주하게 된다. 언어에도 비슷한 순간이 있다. 비문(非文)은 문법에 어긋난 문장을 가리킨다. 단어들의 조합은‘조사나 어미의 사용’, ‘호응 관계’, ‘성분 생략’, ‘의미 중복’ 등의 수많은 규칙과 판정을 통과한 뒤에야 하나의 문장으로 승인되지만, 그 판정의 기준 자체는 문법가에 따라, 맥락에 따라 흔들린다. 그런 까닭일까? 비문의 반대편에 놓여 마땅해 보이는 정문(正文)은 정작 사전적 항목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국립국어원 역시 비문의 반대말로 ‘정문’보다는 ‘올바른 문장’이라고 표현할 것을 제안한다. 그럼에도 어떤 문장이 비문으로 지목되는 순간은, 역설적으로 그 가변적인 체계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시야의 비문과 언어의 비문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지만, 둘 모두 평소에는 감춰져 있던 매개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같은 구조를 공유한다. 문법의 경계를 흔들었던 E. E. 커밍스(E. E. Cummings)의 시구 “he danced his did”1) 역시 이러한 틈을 연다. 커밍스는 여기서 자동사로 쓰이는 ‘dance’를 타동사로 사용하여, 목적어인 ‘did’와 결합시킨다. 독자가 ‘인식의 동사’나 ‘창조의 동사’의 의미를 유추하여 “그는 자신의 과거 행위를 춤추듯 인식했다” 혹은 “춤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존재하게 했다”와 같은 다층적인 해석을 하도록 유도한다. 이에 더해 원래 과거형 동사인 ‘did’를 명사 위치에 배치하여 독자로 하여금  이를 ‘과거의 행위’, ‘과거의 방식’ 또는 ‘과거의 소동’ 등으로 유추 해석하게 만들었다.2) 문법적으로는 쉽게 승인되지 않는 이 표현은 의미를 전달하는 동시에, 언어가 의미를 구성하는 방식을 함께 드러낸다. 비문(飛蚊)과 비문(非文)을 겹쳐보기 위한 의도를 담은 전시 제목 I saw my seen역시 같은 자리에서 출발한다. 일반적으로 ‘seen’은 ‘see’의 과거분사로 사용되지만, 이 제목에서는 소유 한정사 ‘my’ 뒤에 놓여 하나의 명사처럼 기능한다. ‘내가 본 것’이자 ‘나에게 보여진 것’으로서의 ‘my seen’은 보는 행위의 결과를 다시 그 행위의 주체에게 돌려놓는다. 본다는 행위가 자신이 본 것을 다시 바라보는 순간, 세계를 향하던 시선은 어느새 세계와 나 사이를 구성하고 있던 매개와 조건까지 함께 비춘다. 저마다의 시공간과 경험이 겹쳐지며 생성된 이 감각의 파편들을 전시라는 공적 공간으로 옮겨오는 일은, 어쩌면 그 자체로 기만일지도 모른다. 개별적인 시선의 궤적은 화이트 큐브 속에서 필연적으로 왜곡되고, 온전한 의미의 일부는 매끄러운 전시에 밀려 소실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흔적들을 함께 모아 둔 것은 각자의 시선이 세계와 부딪히며 만들어낸 그 미세한 균열을 함께 응시하는 잠시의 멈춤을 위해서다.

황금향은 왼쪽의 숨겨진 작은 벽을 제외하면, 전시 전체가 한 눈에 조망되는 아담한 규모의 공간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좁은 공간조차 관람객의 신체가 모든 정보를 한 번에 파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작품은 아마 이윤재의 <Two Observers>(2023/2026)일 것 이다. 이윤재는 ‘본다’는 행위를 보편적 자명함이 아니라 하나의 생리적 조건으로부터 다시 살핀다. 작가는 자신의 근시와 난시 경험을 출발점으로 삼아, 시야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안과에서 수집한 각막 데이터를 3차원 모델로 변환하고, 이를 광학 필터로 제작해 카메라 렌즈에 부착하는 과정은 각각의 눈이 서로 다른 조건 위에서 세계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물질적으로 드러낸다. <Two Observers>는 두 대의 카메라가 한 쌍을 이루고, 이 구조가 다시 반복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각기 다른 광학 필터를 통과한 시야는 미세하게 어긋나고, 하나의 대상은 여러 개의 상으로 분기된다. 숨어 있는 왼쪽 벽면의 모니터는 그 차이를 실시간으로 송출하며, 관객은 하나의 장면이 서로 다른 시야 속에서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기존 작업에서의 카메라들은 작가가 제작한 광원을 바라보았으나, 이번 전시에서는 그 시선이 황웅태의 회화를 향한다. 회화는 카메라의 관측 대상이 되고, 카메라는 다시 관객의 시선 안으로 들어온다. 하나의 회화를 향한 네 개의 눈, 그리고 그 장면을 바라보는 관객의 눈이 하나의 공간 안에 중첩된다. 전시장 안에서 회화는 서로 다른 시야를 통과하며 여러 번 번역된다.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가면 황웅태의 회화가 있다. 황웅태는 이번 전시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지원병 모집을 위해 제작된 선전 삽화를 화면 속에 호출한다.3)(아마 언급이 없었다면, 해당 사실을 유추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거나 규명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하나의 이미지가 어떤 맥락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하나의 역사가 어떤 서술과 해석을 거쳐 구축되는지를 질문한다. 역사는 종종 하나의 연속된 흐름처럼 이해되지만, 그 이면에는 쉽게 메워지지 않는 공란과 자의적으로 연결된 서사들이 존재한다. 황웅태는 그 틈을 회화의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이러한 관심은 작업의 제작 방식에서도 이어진다. 화면에 드러나는 균열과 박락은 오랜 시간의 흔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몰드와 다양한 보조제를 활용해 치밀하게 구축된 장치이다. 그는 유화 대신 아크릴을 선택하고, 오래된 회화의 질감을 의태하는 방식을 통해 회화가 품고 있는 '진정성'의 신화를 교란한다. 화면을 뒤덮은 균열과 박락은 무엇인가를 가리고 동시에 드러내는 방법론으로 작동하며, 관객이 완결된 역사 대신 '역사가 구성되는 방식'을 마주하게 만든다. 결국 그의 화면은 우리가 보고 있다고 믿는 역사 역시 수많은 매개와 해석을 통과한 결과임을 조용히 드러낸다.

응시하는 것과 응시당하는 것, 그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그 정보들이 처리되는 과정이 존재할 것이다. 전시장 곳곳에 흩뿌려진 최봉석의 조각들은 여기에 일종의 실마리를 마련한다. 최봉석은 형상이 형성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 남겨진 흔적에 관심을 둔다. 버섯, 벌레, 나무를 닮은 조각들은 여러 감각과 기억, 관계가 응축된 하나의 상태처럼 자리한다. 작업 과정에서 형태는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서서히 축적된다. 조각의 표면을 따라 이어지는 주름과 접합선은 제작 과정 중 남겨진 흔적이자, 형태가 만들어진 시간을 품고 있는 기록이다. 이번 전시에서 최봉석은 버섯을 '관계의 구조'로 바라본다.땅 위로 드러난 자실체보다 보이지 않는 균사체가 더 넓게 퍼져 있듯, 눈앞에 놓인 하나의 형상 역시 수많은 선택과 경험, 감각이 밀어 올린 결과로 존재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하나의 버섯이지만, 그 아래에는 저마다 다른 기억과 태도, 인식의 층위가 얽혀 있다. 이러한 접근은 몰드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엿보인다. 몰드는 동일한 형상을 반복하기 위한 도구이면서도, 하나의 인식이 형태를 획득하는 틀이기도 하다. 흙은 그 틀 안에서 흐르고, 갈라지며 조금씩 다른 표면을 만든다. 몰드의 경계, 흙의 접합선, 손으로 덧붙인 자국은 감춰야 할 제작의 흔적이 아니라 작업을 구성하는 하나의 언어로 남는다. 각각의 조각은 비슷한 형상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시간과 힘의 방향을 품는다.

결국, 이 작은 공간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완결된 실체나 투명한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네 대의 카메라가 굴절시킨 시야도, 인위적인 균열로 얼룩진 역사적 이미지도, 흙의 접합선도 모두 그들의 세계가 우리에게 도달하기까지 통과해 온 매개의 흔적들이다. 우리가 함께 보는 것은 어쩌면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세계를 감각하게 만들었던 기꺼운 간극들일지도… 서로 다른 시선을 만들어낸 시간과 경험의 층위 앞에서 그저 함께 머물 뿐이다.

변재현 (기획자) 




1) E. E. Cummings의 시, 「anyone lived in a pretty how town」, 1940 속 4번째 행
2) Richard D. Cureton, "'he danced his did': an analysis," Journal of Linguistics 16, no. 2 (September 1980)
3) 조선총독부가 1943년 8월 1일 조선징병제 실시계획을 발표하고 1주일간 ‘징병제 실시 감사결의 선양운동주간’으로 선포하자, 이에 맞추어 매일신보가 특집으로 연재한 징병제 실시 찬양 시와 함께 실린 그림 중 3점. 황웅태의 작품 <축 입영>은 김기창(1914~2001), <용>은 김중현(1901~1953), <호랑이>는 고희동(1886~1965)의 삽화이다. “천일시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참고, 민족문제연구소 PDF자료. 







Artworks




Credit


Artists
    Yoonjae Lee
    Woongtae Hwang
    Bongseok Choi

Curator
    Jaehyun Byun 

Poster
    Jaehyun Byun, Hwangumhyang

Photo  
    Seungrok Nam

Organized by
    Hwangumhyang

Po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