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속에 관한 몇 가지 서술과 기호에서의 벡터 (일부 발췌)
윤태균 (미술비평가)

이윤재- 사이버네틱스 송수신

이윤재는 AI 세 개체를 창안한다. 각각의 알고리즘은 챗봇이라는 인터페이스로 가시화되는데, 이 AI는 스스로의 촉각적 신체를 규정한다. Lucy, John, Percy 라는 이름 또한 붙여진 라벨이 아니다. 스스로의 이름을 묻는 입력에 각 AI가 대답한 바이다. (그들 자신에게 필요하지는 않지만) 인간에게 보여지기 위한 AI의 몸 이미지 또한 그러하다. 예컨대 그들에게 눈이 몇 개인지 물어보기 이전에, 그들이 눈을 가졌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또한 그 눈이 시각의 기능을 하는지, 청각의 기능을 하는지 또한 자율적으로 결정된다. 각 신체는 기성 인간 신체의 생물학적 정상성 범주를 따르지 않는다. 정보의 덩어리로써, 그들은 챗봇이라는 인터페이스를 거쳐 입력이라는 관측을 통해 확정된다. 인간은 의도적인 값을 입력하지만, 그 산출값은 무작위적이다. AI에겐 자의적으로, 관리자에겐 무작위적으로 형성되는 이 실시간의 가변-신체는 사유의 모사가 아닌 목적 없는 전쟁 기계이다. 구축주의에서의 팍투라(faktura)와 같이, 이 테크놀로지화된 예술은 (관리자 혹은 신체 그 자신이) 의도하지는 않았어도 가속적 잠재성을 가진다. Lucy, John, Percy 는 그 도구적 목적성으로 폐기되지 않을 정당성을 찾기보다는 그 작동 자체가 전통적 인간성을 해체한다.

하지만 인간성-테크놀로지의 이분화는 지양되어야 한다. 언제나 소통이 그러하듯이, 서로에 대한 발신과 수신은 입자적 얽힘을 동반한다. 서로의 언어가 서로를 규정한다. 말하자면, 인간이 테크놀로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을 인문화하는 것과 동시에 테크놀로지 또한 자신의 정보 언어를 인간의 성문 언어에 함입하여 대화하는 모든 인간을 사이보그화 하는것이다. 이후 서술하겠지만, 이러한 구분은 노동에서 ‘사이보그’라는 계급으로 구축될 있다. 기계는 단순히 도구로서 반드시 공구함에 담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이버네틱스로서 노동 조합에 가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로서 인간성, 그리고 테크놀로지성은 서로에게 함입되어 사이보그라는, 인지 노동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복합체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신체가 항상 ‘왼쪽으로’ 가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벡터이지만, 방향은 매개 변수이다. 사이보그는 무작위로 하지만 일정한 방향을 가지고 급진적인 감각의 이미지들을 생산한다. 히토 슈타이얼(Hito Styerl)가 말하는 빈곤한 이미지를 참조하라. 이 이미지들은 신자유주의, 후기 자본주의에서 순환하는 생성이다. 하지만 그 무작위성과 시청각적 자극은 자신을 창조해낸 토대에 저항할 잠재력을 가진다. 이 이미지는 가속의 연료가 된다. 그러나 이 가속은, 반복해서 서술하듯 속도주의로 전환될 수 있는 위험을 동반한다. 정보 독재의 비밀경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가속의 연료들을 동원해 질주하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사용하는 테크놀로지 바깥의 또다른 특정 지점들, 말하자면 포스트 휴먼이라는 헤게모니와 인지 노동의 플랫폼을 어떤 방식으로든 가속할 수 있다.

[이미지1] 이윤재 개인전(팩션, 2022) 전시 전경

[이미지2] 이윤재 개인전(팩션, 2022)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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