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보는 것이 내가 보는 것과 같나요?
문혜진 (미술비평가)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이렇게 묻는다고 상상해보자. “당신이 보는 것이 내가 보는 것과 같은가요?” 어떤 이는 대체 무슨 황당한 소리를 하나 웃어넘길 것이고, 또 다른 이는 저 사람이 색맹이나 색약 증세가 있는 걸까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저 질문이 철학적이거나 의학적인 질문이라면 답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이윤재의 작업을 잘 보기 위해 한번 저 질문에 진지하게 응해 보자. 우선 가장 원론적인 수준에서 말하자면 답은 망막과 시상, 시각피질에서 활성화되는 일련의 세포들 사이의 유사함의 정도와 전두엽에서 빛에 의해 활성화되는 기억이 얼마나 비슷한지에 달려 있다.1) 당신과 나의 삶의 경험이 같을 수는 없으므로 기억이 자극하는 신경세포의 강도 문제는 잊기로 하자. 남은 것은 생리학적 문제다. 당신과 나는 유전자가 다르므로 세포의 양상이 동일할 수는 없기에 내게 보이는 것과 당신에게 보이는 것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나와 같은 방식으로 보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얘기가 또 달라진다. 인간의 눈은 간상체(rods)와 추상체(cones)라는 두 종류의 광수용기를 가지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파장 추상체(적 추상체), 중파장 추상체(녹 추상체), 단파장 추상체(청 추상체)의 세 종류의 추상체를 지닌다.2) 간혹 추상체에 결손이나 변형이 있는 경우 색을 다르게 보게 된다. 이 경우 신체 기관의 기능에 따라 긍정과 부정이 갈릴 것이다. 다소 초점이 달라지지만 질문을 조금만 더 밀고 나가보자. 그렇다면 내가 보는 것은 언제나 동일한가? 같은 조명 조건의 동일한 회색도 주변의 휘도가 어떠한가에 따라 더 밝게도 보이고 더 어둡게도 보인다. 결국 이 긴 자문자답이 향하는 곳은 본다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지, 일관되고 동일한 보기를 가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불성설인지다.
이윤재의 <광학 사중주>(2023)는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작업의 계기는 몇 년 전 제작한 <Only True Voyage>(2021)로 거슬러 올라간다. 난시와 근시가 있는 작가에게 주변 사람들은 줄기차게 라식 수술을 권했는데, 맨눈으로 볼 때 흐릿하고 번지게 보이는 풍경을 좋아했던 작가는 이런 권유가 늘 편치 않았다. 어느 날 버스에서 안경을 벗었을 때 안개가 낀 듯 불빛이 번진 야경을 보고, 작가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듯 스펙터클한 낯선 풍경에 매료되었다.3) 초점이 맞지 않은 풍경의 추상적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던 작가는 자신의 각막의 형태를 본뜬 카메라 필터를 제작하여 그것으로 맨눈으로 보이는 야경을 재현했다. <Lavoratory.Vision>(2020~)은 이를 위해 조사한 과정을 기록한 아카이브다. 각막의 미세한 굴곡을 정교하게 측정하는 각막지형도 검사 장비로 작가는 각막의 삼차원 형태의 좌표 데이터를 얻게 된다. 이 데이터를 3D 모델링하는 과정을 거쳐 CNC 공법으로 PMMA 플라스틱을 깎아 인공 각막을 만든 것이 <Only True Voyage>의 필터다.
<광학 사중주>는 <Only True Voyage>의 방법론을 복수의 사람들에게 확대한다. ‘유일하게 진정한 여행(only true voyage)’은 낯선 땅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을 작가는 문자 그대로 실천한다. 다양한 시각으로 보이는 풍경을 얻기 위해 이윤재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각막공여자를 모집했고 이들의 정교한 각막 지형의 좌표 데이터를 담은 CSV 파일을 얻어 이를 바탕으로 4명의 각막을 본뜬 필터를 제작했다.4) 필터가 씌워진 카메라는 LED 다이오드의 불빛을 실시간으로 붙잡아 화면에 송출한다. 간혹 바람이 불거나 문을 여닫는 등의 진동이 발생하면 불빛이 흔들리고 이는 영상 속 이미지에 그대로 반영된다. 우리는 누군가의 눈에 다이오드 빛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그대로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거대하게 확대해 희끗희끗하게 보이는 불빛이 낯설더라도 의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의 눈에도 쉽게 들어오는 것이 있다. 첫째는 불빛의 모양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고 둘째는 가장 오른쪽에 있는 영상 속 불빛의 직경이 유독 크다는 점이다. 사람의 눈이 모두 다르니 광원의 이미지가 다른 것은 당연한데, 직경이 큰 불빛은 해당 각막의 소유자가 근시가 제일 심함을 가리킨다. 근시의 경우 초점을 맺는 거리가 짧아서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이 크게 번져서 맺힌다. 연관 작업 <Eye Measurement>(2023), <질문의 발견>(2023)은 <광학 사중주>의 해독에 도움을 준다. 8x15로 총 120장의 사진으로 구성된 <Eye Measurement>는 정상시부터 근시까지 단계적으로 달라지는 시력을 열로 하고 각 지원자의 양안을 행으로 하여 시력이 달라지면 빛이 어떻게 다르게 보이는지를 가시화한다. 검정색 바탕으로 표시한 것이 해당 지원자의 눈 상태다. 첫 번째 지원자의 시력은 양안이 비슷하고 상대적으로 좋은 편이고, 네 번째 지원자의 경우 양안의 상태는 비슷하나 오른쪽에 치우쳐 있어 근시가 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반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지원자는 양쪽 눈의 시력 차이가 큰 짝눈임이 드러난다. 안과에서 시력 측정할 때 사용하는 열기구 이미지를 보여주는 <질문의 발견>에서 지원자들이 맨눈으로 보는 풍경이 비로소 명료해진다. <광학 사중주>와 <Eye Measurement>에서 예측했듯, 네 번째 지원자의 시야가 가장 흐릿하며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시각의 차이를 가시화한 이 이미지들은 객관적 데이터의 제시가 아니라 다르게 바라봄을 옹호한다. 보기에 기반한 시각예술이 다르게 보는 것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느냐고 작가는 묻는다. 작가의 맨눈을 본뜬 필터를 통해 자신의 시각을 찍은 <자화상>(2023)은 본인의 얼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보이는 대로 찍는게 진짜 내가 아닌가라는 작가의 생각을 반영한다.5) <도움 주신 분들>(2023) 역시 각막 정보를 공유해준 지원자들에게 그들의 맨눈으로 보이는 작가의 얼굴을 재현함으로써 상대의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내밀한 연대를 맺는 특별한 선물이다. 이는 두 가지 생각으로 이끈다. 이런 사유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지 그리고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다. 오류나 다름에 대한 주목은 알고 보면 유래가 깊고 일관적이다. 프린터의 오류를 추상적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인 <Please stay annoying>(2014)나 240mm와 245mm 사이의 애매한 크기인 본인의 발을 잘못된 실크 스크린 인쇄로 표현한 <243mm>(2015)는 표준에 맞추라는 규격화의 폭력성을 작가가 일찍이 인지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규율이나 체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합의가 달라지면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은 2016년, 2018년, 2020년 세 번에 걸쳐 제작된 <Calendar> 연작에서 잘 드러난다. 율리우스력의 도입 시기에 따라 날짜가 달라지는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의 1582년 12월의 달력이나, 12달을 행으로 하고 일주일을 열로 해 각기 다른 열 가지 방식으로 한 해를 표기한 2016년의 달력 드로잉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이 아니고서도 얼마든지 시간을 분류하고 표기할 수 있음을 예증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정상성의 문제로 이어진다. 정상과 비정상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특히 근대화가 곧 배제와 규율로 성립되었음은 푸코 이후에 상식이 되었다. 아감벤 같은 경우 인간의 문명 자체가 호모 사케르(Homo Sacer)와 호모 사케르가 아닌 자를 구분하며 시작되었고 이 행위가 시원적 정치적 관계라고 말한다.6)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라는 뻔한 규범적 주장을 하는 것보다, 우리의 시각 자체가 선명함만을 추구하지 않음을 슬쩍 흘릴까 한다. 중심시(foveal vision)라 불리는 시각 중심 영역은 대상의 세부를 자세히 보는데 특화되어 있지만, 주변시(peripheral vision)로 불리는 시각의 여타 영역의 능력은 대상을 넓게 보고 공간적 장면을 구성하는데 쓰인다.7) 얼굴 표정이나 감정 등의 종합적 정보는 주변 시야로 파악한다. 흐릿하게 보기가 애초에 우리 눈의 중요한 기능이라면 아름다움이 아닌 효용의 측면에서도 명료함만을 옳다고 규정하는 것은 모순이 된다. 시각예술의 본질인 보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는 이윤재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미술에 내재하는 배제와 전제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각자의 ‘진정한 여행’은 이런 ‘질문의 발견’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1) 마거릿 리빙스턴(정호경 역), 『시각과 예술』 (서울: 두성북스, 2010), 35쪽.
2) 위의 책, 27-37쪽.
3) 이윤재, 「작가노트」, 2021 (https://yoonjaelee.net/Only-True-Voyage-1)
4) 총 공여자는 12명이었고 각막의 차이와 비용 등을 고려해 4명의 데이터가 선택되었다. 양안이므로 제작된 필터는 총 8개다.
5) 이윤재 인터뷰, 2023년 8월 28일.
6) 사회적 생명을 부여받지 못한 이를 가리키는 말로 역설적으로 제물로도 바칠 수 없는 인간을 뜻한다. 이들은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기에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하지 않으며 인간의 법과 신의 법 바깥에 존재한다. 조르조 아감벤(박진우 역), 『호모 사케르』 (서울: 새물결, 2008).
7) 마거릿 리빙스턴, 72-78쪽.
링크 : http://ocimuseum.org/portfolio-item/%ec%9d%b4%ec%9c%a4%ec%9e%ac-viewers-condi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