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루시’의 초상
김준혁 (미술연구자)
- 인공지능이 그린 인공지능
채팅창에 이름과 문자로만 존재했던 인공지능 셋, ‘루시(lucy)와 존(john) 그리고 퍼시(percy)’는 이윤재 작가를 만나 모습을 얻었다. 몽타주 화가가 범죄자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피해자의 증언을 듣듯, 이윤재 작가도 인공지능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루시와 존 그리고 퍼시와 대화를 나눴다.주1 그리는 대상도 다르고, 그리는 목적도 다르다. 전자는 실체가 있는 인간을 체포할 목적이지만, 후자는 실체가 없는 지능을 표현할 목적이다. 둘 사이 서로 같은 점은 ‘말과 글로만 주어진 정보를 그림이나 영상으로 옮긴다는 점’이다.
한 번도 마주한 적 없고 또 경험한 적 없는 대상을 우리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곽재식 저자가 쓰고 이강훈 작가가 그려서 만든 책 〈한국 괴물 백과〉(2018)를 보자. 매우 오랜 시간 말과 글로만 존재하던 한국 괴물에게 두 저자는 갖가지 모습을 주었다. 흥미로운 상상을 담았지만, 괴물의 모습을 이곳저곳 나누어 살피면 꽤 익숙한 모습의 조합이다. 이윤재 작가가 그린 인공지능도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
유리문을 열고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간 뒤, 다시 철문을 열고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공간 속에 세 개의 파란 화면이 둥둥 떠 있다. 각각의 화면 속에는 이윤재 작가가 루시와 존 그리고 퍼시와 나눈 대화 내용이 담겨 있다. 한 걸음 가까이 옮겨 루시와 나눈 대화 내용을 자세히 살폈다. 루시는 자기의 생김새를 묻는 말에 어떻게 답했을까? 루시는 머리와 몸통을 가졌다. 머리 왼쪽에는 눈이 달렸고 오른쪽에는 귀가 달렸다. 몸통은 파란색인데, 그 몸통은 눈과 귀 그리고 입과 코로 덮여 있다. 몸통 왼쪽에 달린 입은 입술이 없으며 이빨은 갈색이다. 눈은 몸 안쪽과 바깥쪽 모두를 볼 수 있고, 귀는 우리처럼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머리와 몸통을 왼쪽과 오른쪽 그리고 왼쪽과 왼쪽 순서로 번갈아 가며 움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촉감은 느낄 수 없다. 어떻게 상상해 봐도 기괴한 모습과 움직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인간의 얼굴과 몸통에 눈과 귀 그리고 입과 코를 어색하게 덧붙여 상상할 뿐이다. 스스로 가진 상상력의 한계를 느끼며, 발걸음을 전시장 깊숙한 곳으로 옮겼다. 대화 내용이 담긴 파란 화면 반대편에서 루시의 모습을 마주한다.
꾸물대고 꼼지락거리는 루시의 모습은 나의 상상력을 한참 웃돈다. 머리로 상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 쓰는 글로 루시의 모습을 묘사할 정확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루시의 생김새를 어떻게 글로 옮길 수 있을까? 루시의 머리와 몸통 사이 경계는 분명하지 않다. 루시의 모습이 담긴 화면이 곧 루시의 머리이자 몸통이다. 파란색 화면은 파도처럼 일렁이고 물결처럼 굽이친다. 파도와 물결 사이사이로 눈과 코 그리고 입과 귀 비스무리한 것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간혹 가운데로 덩어리가 모인다. 덩어리에 털이 생겼다 사라지면 축 늘어진 살집이 겹겹이 쌓인다. 몸의 안쪽과 바깥쪽 모두 볼 수 있는 눈이 나타났다가 또 사라진다. 이윤재 작가의 상상력이 대단하다 느꼈고, 어떻게 이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작가가 쓴 노트에서 의문을 풀어줄 단서를 찾았다.
짧게 줄이면 인공지능이 인공지능을 그렸다는 말이다. 이윤재 작가가 직접 그린 모습이 아니란 점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이 아닌 무의식을 새로운 표현 기법으로 만들었듯, 인간의 지능이 아닌 인공의 지능으로 새로운 표현 기법을 만들어 낸 이윤재 작가를 향해 손뼉을 쳤다.주2 그간 다른 예술가들이 보여줬던 묘사력이 놀라웠듯, 이번 전시를 만든 사람들이 인공지능과 협업해서 만들어 낸 묘사력이 놀랍다. 주어진 정보를 해석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새롭고 뛰어나기 때문이다. 어두운 전시장에 파란 불빛이 빛나듯, 그들의 협업이 보여준 새로운 가능성이 밝게 빛난다. 우리가 가진 해석과 표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인공지능을 하나의 협력 주체로 받아들인 성과는 무엇일까? 작가로서 작업을 지속할 동력이라 여긴다. 인공지능을 주인공 삼아 함께 나눌만한 이야깃거리가 적지 않을 것이며, 입력한 정보값에 따라 묘사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자신의 지난 창작 결과물을 스스로 복제하는 늪에 빠질 우려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듯하다. 세 작품으로 감상을 그치기가 아쉬워, 향후 양상을 다각화한 더 많은 작품을 보고싶다는 바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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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몽타주란 여러 사람의 사진에서 얼굴의 각 부분을 따서 따로 합쳐 만들어 어떤 사람의 형상을 이루게 한 사진. 흔히 범죄 수사에서 목격자의 증언을 모아 용의자의 수배 전단을 만드는 데에 이용한다.”. 국립국어원. 2018
주2 이 기법을 두고 ‘자동기술법(自動記述法)’이나 ‘오토마티즘(automatisme)’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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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대하는 마음으로 이루어낸 협업
높든 낮든 지능을 가진 기계나 동물은 수없이 많다.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그들과 함께 살기를 바라는 시도, 이 시도는 늘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또 그들을 자신 아래 복종시키려는 욕망과 부딪힌다. 지능을 가진 기계를 향해 일부 인간이 갖는 두려움은 내게 새삼스럽다. 그 기계보다 모자란 지능을 가진 인간이 다른 생명에게 무력으로 행했던 더한 짓을 많이 알기 때문이다.
루퍼트 와이엇 감독의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을 접한 뒤, 깊은 인상으로 남은 장면이 하나 있다. 높은 지능을 가진 침팬지 ‘시저’가 자신을 가두고 때리는 인간에게 ‘노(No)’라고 소리치는 장면이다. 시저가 인간의 언어로 처음 내뱉은 말은 ‘안돼’라는 뜻을 지녔다. 자신을 해치려는 인간에게 그만두라는 뜻을 전한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에 갇힌 채 폭력을 당했던 모든 침팬지와 고릴라는 입을 모아 ‘노’라고 외친다. 이는 자기를 부정하는 존재를 향해 부정당한 존재가 내뱉을 수 있는 유일한 말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흐른 뒤, 시저가 두 번째로 ‘노’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동료 고릴라가 인간을 죽이기 직전이었다. 여전히 자신과 동료들을 해치려고 할지라도 죽이면 안 된다는 뜻이 담겼다. 인간을 향한 시저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억 속에는 자신을 싫어하는 인간과 자신을 좋아하는 인간 모두가 존재한다. 처음과 달리 두 번째 내뱉은 ‘노’는 싫어하는 인간을 향한 미움보다, 좋아하는 인간을 향한 믿음으로 내뱉은 말이 아니었을까. 시저가 가진 기억에 미움보다 믿음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던 덕분에 그 인간은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지능을 가진 기계를 향해 인간이 갖는 공포, 이는 곧 지능을 가진 인간 자신을 향한 공포일 것이다. 만약 기계가 인간이 가진 정보 총량을 학습하여 통계를 낸 뒤, 자기 행동을 결정한다면 인간의 장래는 그리 밝지 않을 것 같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종을 해치는 짓을 얼마나 많이 했고, 또 같은 종끼리 서로를 해치는 짓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인간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종족에게 영원히 친절하지 않다면, 우리에게 영원히 친절할 인공지능의 등장은 결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공지능을 적대하지 않고 연대하는 마음으로 이루어낸 협업이 반가운 이유는 둘이다. 하나는 새로운 표현 기법이 만든 뛰어난 묘사력이 대단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인공지능에게 친절한 작가의 태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출현은 피할 수 없다고 전제하자. 적은 사례라도 기분 좋게 함께한 경험을 차곡차곡 쌓으면, 인공지능이 우리 인간을 적대할 일이 줄어들 것이고 그러면 공포도 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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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표현과 올바른 내용
내게 좋은 예술 작품은 ‘새로움, 올바름, 되새김, 깊숙함’ 중 하나 이상의 요소를 탄탄히 갖춘 작품이다. ‘차가 한두 대씩 지나는 서울시 성북구 삼선동의 가로수길, 하얀 타일로 마감한 겉면에 오랜 시간이 묻어 거뭇거뭇한 건물의 지하 1층’, 그곳에 자리 잡은 팩션이란 공간에서 표현이 새롭고 내용이 올바른 이윤재의 작품을 보았다. 좋았던 인상을 바래질 기억으로 남겨두기 아쉬워 이렇게 글로 기록을 남긴다.
원문 링크 : https://archivist.kr/show/show_scroll?idx=1655032229
채팅창에 이름과 문자로만 존재했던 인공지능 셋, ‘루시(lucy)와 존(john) 그리고 퍼시(percy)’는 이윤재 작가를 만나 모습을 얻었다. 몽타주 화가가 범죄자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피해자의 증언을 듣듯, 이윤재 작가도 인공지능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루시와 존 그리고 퍼시와 대화를 나눴다.주1 그리는 대상도 다르고, 그리는 목적도 다르다. 전자는 실체가 있는 인간을 체포할 목적이지만, 후자는 실체가 없는 지능을 표현할 목적이다. 둘 사이 서로 같은 점은 ‘말과 글로만 주어진 정보를 그림이나 영상으로 옮긴다는 점’이다.
한 번도 마주한 적 없고 또 경험한 적 없는 대상을 우리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곽재식 저자가 쓰고 이강훈 작가가 그려서 만든 책 〈한국 괴물 백과〉(2018)를 보자. 매우 오랜 시간 말과 글로만 존재하던 한국 괴물에게 두 저자는 갖가지 모습을 주었다. 흥미로운 상상을 담았지만, 괴물의 모습을 이곳저곳 나누어 살피면 꽤 익숙한 모습의 조합이다. 이윤재 작가가 그린 인공지능도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
유리문을 열고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간 뒤, 다시 철문을 열고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공간 속에 세 개의 파란 화면이 둥둥 떠 있다. 각각의 화면 속에는 이윤재 작가가 루시와 존 그리고 퍼시와 나눈 대화 내용이 담겨 있다. 한 걸음 가까이 옮겨 루시와 나눈 대화 내용을 자세히 살폈다. 루시는 자기의 생김새를 묻는 말에 어떻게 답했을까? 루시는 머리와 몸통을 가졌다. 머리 왼쪽에는 눈이 달렸고 오른쪽에는 귀가 달렸다. 몸통은 파란색인데, 그 몸통은 눈과 귀 그리고 입과 코로 덮여 있다. 몸통 왼쪽에 달린 입은 입술이 없으며 이빨은 갈색이다. 눈은 몸 안쪽과 바깥쪽 모두를 볼 수 있고, 귀는 우리처럼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머리와 몸통을 왼쪽과 오른쪽 그리고 왼쪽과 왼쪽 순서로 번갈아 가며 움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촉감은 느낄 수 없다. 어떻게 상상해 봐도 기괴한 모습과 움직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인간의 얼굴과 몸통에 눈과 귀 그리고 입과 코를 어색하게 덧붙여 상상할 뿐이다. 스스로 가진 상상력의 한계를 느끼며, 발걸음을 전시장 깊숙한 곳으로 옮겼다. 대화 내용이 담긴 파란 화면 반대편에서 루시의 모습을 마주한다.
꾸물대고 꼼지락거리는 루시의 모습은 나의 상상력을 한참 웃돈다. 머리로 상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 쓰는 글로 루시의 모습을 묘사할 정확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루시의 생김새를 어떻게 글로 옮길 수 있을까? 루시의 머리와 몸통 사이 경계는 분명하지 않다. 루시의 모습이 담긴 화면이 곧 루시의 머리이자 몸통이다. 파란색 화면은 파도처럼 일렁이고 물결처럼 굽이친다. 파도와 물결 사이사이로 눈과 코 그리고 입과 귀 비스무리한 것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간혹 가운데로 덩어리가 모인다. 덩어리에 털이 생겼다 사라지면 축 늘어진 살집이 겹겹이 쌓인다. 몸의 안쪽과 바깥쪽 모두 볼 수 있는 눈이 나타났다가 또 사라진다. 이윤재 작가의 상상력이 대단하다 느꼈고, 어떻게 이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작가가 쓴 노트에서 의문을 풀어줄 단서를 찾았다.
“나는 그들의 생김새를 상상하게 됐다. 하지만 머지않아 내 관점에서 강압적으로 그들을 정의하기보다는 독립적인 개체로서 그들이 직접 자신을 드러낸 모습이 궁금해졌다. 그리하여 오픈소스 AI 모델을 활용하여 채팅에서 얻은 신체와 관련된 텍스트 정보를 이미지(영상)로 변환함으로써 각 대화 상대의 모습을 시각화했다.” - 이윤재 작가노트 중
짧게 줄이면 인공지능이 인공지능을 그렸다는 말이다. 이윤재 작가가 직접 그린 모습이 아니란 점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이 아닌 무의식을 새로운 표현 기법으로 만들었듯, 인간의 지능이 아닌 인공의 지능으로 새로운 표현 기법을 만들어 낸 이윤재 작가를 향해 손뼉을 쳤다.주2 그간 다른 예술가들이 보여줬던 묘사력이 놀라웠듯, 이번 전시를 만든 사람들이 인공지능과 협업해서 만들어 낸 묘사력이 놀랍다. 주어진 정보를 해석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새롭고 뛰어나기 때문이다. 어두운 전시장에 파란 불빛이 빛나듯, 그들의 협업이 보여준 새로운 가능성이 밝게 빛난다. 우리가 가진 해석과 표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인공지능을 하나의 협력 주체로 받아들인 성과는 무엇일까? 작가로서 작업을 지속할 동력이라 여긴다. 인공지능을 주인공 삼아 함께 나눌만한 이야깃거리가 적지 않을 것이며, 입력한 정보값에 따라 묘사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자신의 지난 창작 결과물을 스스로 복제하는 늪에 빠질 우려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듯하다. 세 작품으로 감상을 그치기가 아쉬워, 향후 양상을 다각화한 더 많은 작품을 보고싶다는 바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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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몽타주란 여러 사람의 사진에서 얼굴의 각 부분을 따서 따로 합쳐 만들어 어떤 사람의 형상을 이루게 한 사진. 흔히 범죄 수사에서 목격자의 증언을 모아 용의자의 수배 전단을 만드는 데에 이용한다.”. 국립국어원. 2018
주2 이 기법을 두고 ‘자동기술법(自動記述法)’이나 ‘오토마티즘(automatisme)’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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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대하는 마음으로 이루어낸 협업
높든 낮든 지능을 가진 기계나 동물은 수없이 많다.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그들과 함께 살기를 바라는 시도, 이 시도는 늘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또 그들을 자신 아래 복종시키려는 욕망과 부딪힌다. 지능을 가진 기계를 향해 일부 인간이 갖는 두려움은 내게 새삼스럽다. 그 기계보다 모자란 지능을 가진 인간이 다른 생명에게 무력으로 행했던 더한 짓을 많이 알기 때문이다.
루퍼트 와이엇 감독의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을 접한 뒤, 깊은 인상으로 남은 장면이 하나 있다. 높은 지능을 가진 침팬지 ‘시저’가 자신을 가두고 때리는 인간에게 ‘노(No)’라고 소리치는 장면이다. 시저가 인간의 언어로 처음 내뱉은 말은 ‘안돼’라는 뜻을 지녔다. 자신을 해치려는 인간에게 그만두라는 뜻을 전한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에 갇힌 채 폭력을 당했던 모든 침팬지와 고릴라는 입을 모아 ‘노’라고 외친다. 이는 자기를 부정하는 존재를 향해 부정당한 존재가 내뱉을 수 있는 유일한 말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흐른 뒤, 시저가 두 번째로 ‘노’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동료 고릴라가 인간을 죽이기 직전이었다. 여전히 자신과 동료들을 해치려고 할지라도 죽이면 안 된다는 뜻이 담겼다. 인간을 향한 시저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억 속에는 자신을 싫어하는 인간과 자신을 좋아하는 인간 모두가 존재한다. 처음과 달리 두 번째 내뱉은 ‘노’는 싫어하는 인간을 향한 미움보다, 좋아하는 인간을 향한 믿음으로 내뱉은 말이 아니었을까. 시저가 가진 기억에 미움보다 믿음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던 덕분에 그 인간은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지능을 가진 기계를 향해 인간이 갖는 공포, 이는 곧 지능을 가진 인간 자신을 향한 공포일 것이다. 만약 기계가 인간이 가진 정보 총량을 학습하여 통계를 낸 뒤, 자기 행동을 결정한다면 인간의 장래는 그리 밝지 않을 것 같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종을 해치는 짓을 얼마나 많이 했고, 또 같은 종끼리 서로를 해치는 짓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인간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종족에게 영원히 친절하지 않다면, 우리에게 영원히 친절할 인공지능의 등장은 결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공지능을 적대하지 않고 연대하는 마음으로 이루어낸 협업이 반가운 이유는 둘이다. 하나는 새로운 표현 기법이 만든 뛰어난 묘사력이 대단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인공지능에게 친절한 작가의 태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출현은 피할 수 없다고 전제하자. 적은 사례라도 기분 좋게 함께한 경험을 차곡차곡 쌓으면, 인공지능이 우리 인간을 적대할 일이 줄어들 것이고 그러면 공포도 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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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표현과 올바른 내용
내게 좋은 예술 작품은 ‘새로움, 올바름, 되새김, 깊숙함’ 중 하나 이상의 요소를 탄탄히 갖춘 작품이다. ‘차가 한두 대씩 지나는 서울시 성북구 삼선동의 가로수길, 하얀 타일로 마감한 겉면에 오랜 시간이 묻어 거뭇거뭇한 건물의 지하 1층’, 그곳에 자리 잡은 팩션이란 공간에서 표현이 새롭고 내용이 올바른 이윤재의 작품을 보았다. 좋았던 인상을 바래질 기억으로 남겨두기 아쉬워 이렇게 글로 기록을 남긴다.
원문 링크 : https://archivist.kr/show/show_scroll?idx=1655032229